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자겸의 난 (문단 편집) === 승평문 대치 === 다음날 아침 척준경은 아들과 동생의 시체를 회수하는데 분노가 머리 끝까지 뻗친 척준경은 이자겸의 아들 [[이지보]], 윤한, 최식, 이후진을 시켜 군대를 소환하고 무기고를 털어 자기 마음대로 장비시킨 뒤 궁성의 정문인 승평문[* 이 문은 [[경복궁]]의 [[경복궁 광화문|광화문]]같이 생각하면 된다.]을 포위한다. 또한 이자겸의 아들 이의장이 자신이 주지로 있던 [[현화사]]의 [[승병]]을 끌고 와 가세하니 궁성 안의 병사들은 소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척준경-이자겸파와 왕당파가 승평문 및 신봉문에서 대치하던 중 인종이 직접 신봉문으로 움직였다. 인종은 금색 일산을 든 호위대와 도착했고 척준경이 소환한 군대는 자신들의 군주를 보자 대열을 갖춰 절(拜)을 하고 만세(萬歲)를 외쳤다.[* 이 <고려사>의 기록은 의미심장하다. 아무리 척준경이 권세가 강했어도 결국 군대는 인종에게 충실했다는 것.] 인종은 신하 이중을 보내 문답한다. >인종: "네 무리(輩)는 왜 병(兵)을 끌고 왔는가?" >척준경파: "듣자하니 적이 금중(禁中)[* 궁궐의 다른 말.]에 들어왔다하여 사직을 호위하기 위함입니다." >인종: "없다. 짐 역시 무상하다. 너희 등은 갑옷을 풀고 해산하라." >---- >인종과 척준경, 승평문 대치 중에.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인종은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고 분노에 찬 척준경을 달래기 위해 이중을 시켜 은화를 나눠주며 무장을 해제토록 했다. 그러나 척준경은 멈추지 않고 군주의 명령을 받은 이중을 검으로 위협해 물러나게 하고 군대를 다시 무장시켜 고함을 지르게 했다. 결국 싸움이 시작됐으며 심지어 인종에게까지 화살이 날아오자 호위대는 방패로 인종을 지키면서 후퇴하였고, 이의장의 승병은 신봉문의 기둥을 도끼로 찍어 무너뜨리려고 했다. 인종의 호위대는 신봉루에서 승병의 머리를 활로 쏘아 항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